신축 다가구주택, 안심하고 들어간 집
이수진 씨(가명, 34세)는 2021년 겨울, 대전에서 첫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회초년생이라 모아둔 돈은 많지 않았지만, 마침 대출과 소액 저축을 합치면 신축 다가구주택 전세 보증금을 맞출 수 있었다.
공인중개사는 건물을 소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집주인이 이 동네에서 건물을 여러 채 갖고 계신 분이에요. 사업을 크게 하시는 분이라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등기부등본을 떼어봐도 근저당은 크게 잡혀 있지 않았다. 이 씨는 '여러 채를 운영할 정도면 재정 상태가 탄탄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이 훗날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당시에는 알 방법이 없었다.
자기 돈 한 푼 없이 불어난 건물들
이 씨가 살게 된 건물의 소유주는 부동산 법인을 운영하던 52세 A씨였다. 그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대전 등 전국 각지에서 다가구주택을 수십 채까지 늘려나갔다. 방식은 단순했다. 새 건물을 지을 때 자기 자본을 거의 들이지 않고, 세입자가 낼 전세보증금을 미리 계산해 건축 자금에 끼워 넣는 것이었다.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였다.
건물이 완공되면 세입자를 받아 보증금을 챙기고, 그 돈의 일부로 다음 건물을 짓거나 앞서 받은 보증금을 돌려막았다. 겉으로는 사업이 확장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신규 세입자의 돈으로 기존 세입자의 빚을 메우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둘 늘어나는 불안한 소문
이 씨가 이상한 낌새를 처음 느낀 것은 2023년 무렵이었다. 같은 건물, 그리고 근처 다른 건물 세입자들 사이에서 "계약 만료가 됐는데 보증금을 못 받았다"는 이야기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별적인 사정이려니 했지만, 비슷한 사례가 계속 이어지자 불안감이 커졌다.
"집주인한테 전화해도 이제 잘 안 받아요. 문자만 겨우 답이 오는데,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에요."
이 씨를 포함해 대전과 인근 지역 세입자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피해 규모가 한두 명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또 하나의 전세사기
수사가 진행되면서 밝혀진 사실은 세입자들을 다시 한번 얼어붙게 했다. A씨는 이 사건과는 별도의 전세사기로 이미 1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상태였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입주 대상 수급자가 살 집을 물색해 집주인과 먼저 전세계약을 맺고, 그 집을 입주 대상자에게 다시 임대해주는 '전세임대주택 지원제도'를 악용한 혐의였다. 자기 명의 다가구주택의 선순위 보증금을 허위로 기재해 LH를 속이고 보증금 159억원을 가로챈 것으로 조사됐다.
주목할 점은 시기다. LH를 상대로 한 범행 역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세입자들을 상대로 한 갭투자 범행과 같은 기간에 이뤄졌다. 감옥에 있는 동안 새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벌여 놓은 범행이 서로 다른 재판으로 나뉘어 뒤늦게 차례로 드러난 것이다. 세입자들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그때, 이미 같은 수법의 피해가 다른 곳에서도 쌓여가고 있었지만 계약 당사자들이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다.
대전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박우근 부장판사)는 A씨에게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다가구주택을 수십 채 건립해 임대차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없었는데도 임차인 약 200명으로부터 보증금 약 230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사기 등)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방조 혐의로 함께 기소된 60세 법인 사내이사 B씨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 120시간이 선고됐다. B씨가 방조한 범행은 피해자 3명, 3억5,500만원 규모였다.
재판부는 "전세사기 범행은 임차인들의 주거 생활 안정성을 심각하게 위협할 뿐만 아니라 주택 임대차 거래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라며 A씨가 범행 대부분을 부인하고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처음부터 사기를 계획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갭투자 열풍을 좇아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대하다 범행에 이르렀다는 점, 경매가 진행되면 피해 금액 중 일부는 회복될 것으로 보이는 점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고 밝혔다.
두 사건 모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징역 15년이 선고된 이 사건은 A씨가 항소해 항소심이 열릴 예정이고, 징역 20년이 선고된 별건 사건도 검찰과 A씨 양측이 모두 항소해 대전고법에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여전히 남은 불안
이 씨는 재판 소식을 전해 듣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형이 선고됐다고 해서 잃어버린 보증금이 곧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다른 전세사기로 이미 징역 20년을 받았다는 걸 뉴스로 알았을 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싶었어요. 저희가 계약하던 그때 이미 벌어지고 있던 일인데, 알 방법이 없었잖아요."
건물이 여러 채라는 사실이 오히려 신뢰의 근거가 됐던 계약, 그 이면에 감춰져 있던 것은 반환 능력 없이 쌓아 올려진 숫자놀음이었다.
건물 채수가 아니라, 반환 능력을 확인하세요
임대인이 건물을 여러 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재정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자본으로 급격히 채수를 늘린 경우, 보증금을 돌려막는 구조 자체가 위험 신호일 수 있다. 계약 전 등기부등본만 볼 것이 아니라, 안심전세앱에서 임대인의 보증사고 이력과 국토교통부가 공개하는 '상습 채무불이행자(악성 임대인)' 명단에 올라 있는지, 해당 주택의 선순위 보증금 규모는 얼마인지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가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