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이사장이 새 집주인이라는 소식
이지은 씨(가명, 29세)는 2019년 봄, 부산 소재 오피스텔에 전세로 입주했다. 회사와 가까워 출퇴근이 편했고, 무엇보다 계약을 도운 공인중개사가 귀띔해준 집주인의 이력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이 건물주가 예전에 시 산하기관 이사장도 지내고, 구청 부구청장까지 하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 설마 문제 생기게 하시겠어요."
이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직 이력이 있는 집주인이라면 적어도 '먹튀'는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보증금 8천만원을 마련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실제 낸 돈은 300채 중 극히 일부
이 씨는 알 수 없었지만, 건물주 A씨(70대)는 2016년 8월부터 2020년 3월 사이 본인과 배우자, 아들,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명의로 부산 일대 오피스텔 약 300가구를 사들이고 있었다. 매입 규모는 358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A씨가 실제로 현금으로 지급한 돈은 24억원 남짓이었다. 나머지는 건물에 걸려 있던 기존 담보대출과, 이미 살고 있던 세입자들의 보증금 반환 채무를 그대로 승계하는 방식으로 충당했다. 자기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건물 수백 채를 사들이는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였다.
이 씨가 낸 보증금 8천만원도, A씨 입장에서는 새로 떠안은 채무 항목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대출까지 노린 위조 계약서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21년 11월, A씨는 건물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47억 8천만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이때 제출한 임대차계약서에는 실제 보증금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 적혀 있었다. 세입자들이 낸 진짜 보증금 액수가 드러나면 담보 가치 평가에서 대출 한도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 씨를 비롯한 세입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보증금이 적힌 계약서가 위조돼 은행에 제출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건물은 겉보기엔 별문제 없이 관리됐고, 월세와 관리비도 큰 잡음 없이 처리됐다. 의심할 계기가 없었다.
뒤늦게 걸려온 수사기관의 연락
2024년 가을, 이 씨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었다. A씨가 운영해온 오피스텔 매입·대출 구조 전반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며, 참고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임대차계약서에 적힌 보증금 액수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수사관의 질문에 이 씨는 그제야 자신이 낸 보증금과 은행에 제출된 서류상의 금액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직 이력이 화려했던 집주인은, 알고 보니 세입자들의 보증금 채무를 발판 삼아 건물을 불려온 것이었다.
징역 10년, 그러나 남은 앙금
2026년 7월 24일, 부산지법 형사6부는 A씨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사기)과 사문서위조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확인된 피해자만 86명, 피해액은 76억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12명은 총 9억 725만원의 배상 명령을 받았다.
법정에 나온 피해자들은 오히려 항의했다. 사기죄 법정 최고형은 15년인데, 10년 선고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 씨 역시 소식을 전해 듣고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이 공직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더 안심했어요. 그런데 정작 저희 보증금은 그 사람이 건물을 사는 데 쓰인 '공짜 돈' 취급을 받았던 거예요."
번듯한 이력과 직함은 세입자의 경계심을 낮추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그리고 그 이력 뒤에서, 무자본으로 사들인 건물과 위조된 서류가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이런 수법을 조심하세요
이번 사례의 핵심 수법을 정리했다.
- 신뢰 이력 악용: 공직·기업 경력 등 화려한 이력을 앞세워 세입자의 경계심을 낮춤
- 무자본 갭투자: 실제 지급한 현금은 매입가의 일부뿐, 나머지는 기존 담보대출과 세입자 보증금 반환 채무를 그대로 승계
- 명의 분산: 본인·배우자·자녀·운영 회사 등 여러 명의로 매입 규모를 나눠 감시망을 피함
- 이중 서류 제출: 실제 보증금보다 낮게 적은 위조 임대차계약서를 금융기관에 제출해 추가 담보대출 편취
- 장기간 잠복: 건물·관리비가 정상 운영되는 것처럼 보여 수년간 발각되지 않음
피해 예방 체크리스트
- [ ] 집주인의 직업·경력이 아니라 등기부등본상 실제 소유 구조와 채무 현황을 확인하세요.
- [ ] 집주인이 같은 건물이나 인근에 여러 채를 보유하고 있는지 등기부등본으로 확인하세요.
- [ ] 계약 전 건물 전체 근저당권 설정액이 시세 대비 과도하지 않은지 따져보세요.
- [ ]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계약 즉시 받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확보하세요.
- [ ] HUG(주택도시보증공사) 전세보증보험 가입 가능 여부를 계약 전 반드시 확인하세요.
- [ ] 계약 갱신·연장 시점마다 등기부등본을 다시 열람해 담보 상태 변화를 점검하세요.
- [ ] 집주인이 여러 회사·가족 명의로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면 실제 소유·관리 주체를 명확히 확인하세요.
피해를 당했다면
전세사기가 의심되거나 피해를 입었다면, 다음 절차를 진행하세요.
- 임차권 등기명령 신청: 이사 후에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경찰 신고: 112 또는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하세요.
- 전세사기 피해자 결정 신청: 전세사기피해자 지원관리시스템(jeonse.kgeop.go.kr)에서 신청하세요.
- 형사 배상명령 신청: 재판 과정에서 배상명령을 신청하면 별도 민사소송 없이 피해액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 법률 상담: 대한법률구조공단(132), 전세사기 피해지원 콜센터(1670-5878)를 이용하세요.
이 사연은 실제 판결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등장인물은 가명이며, 실제 사건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