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련한 신혼의 보금자리
올해 31세인 박지훈 씨(가명)와 아내 이수연 씨(가명, 30세)는 결혼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첫 보금자리를 마련할 순간을 맞이했다. 3년간 둘이 모은 돈과 전세자금대출을 합쳐 쥔 2억 8천만 원. 서울 마포구 인근의 한 빌라 매물을 공인중개사로부터 소개받았다.
"신혼집이니까 좀 무리해도 괜찮다 싶었어요. 역에서 가깝고 새로 리모델링도 했고, 가격도 주변 시세에 딱 맞았거든요."
꼼꼼히 확인했다는 믿음
박 씨는 계약 당일 직접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았다. 소유자 이름은 '최○○'로 계약 상대방과 일치했다. 근저당도 없었다. 甲구(소유권), 乙구(소유권 외 권리)를 차례로 살폈다.
"표제부, 갑구, 을구 다 봤어요. 갑구에 소유자 이름 맞고, 을구에 별다른 근저당 없고. 인터넷에서 '전세 계약 전 이것만 확인하면 된다'는 글 보고 그대로 했거든요."
중개사도 자신 있게 말했다.
"이 집 안전해요. 저도 이 동네 10년째 중개하는데, 집주인 분 신뢰할 수 있는 분이세요. 걱정 마시고 계약하세요."
박 씨 부부는 안심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잔금을 치르고 이사를 마쳤다. 전입신고도 당일 처리하고 확정일자까지 받았다. 할 수 있는 모든 절차를 밟았다고 생각했다.
6개월 뒤에 날아온 내용증명
이사한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박 씨 부부에게 낯선 우편물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신탁주식회사'. 처음 보는 회사 이름이었다.
내용증명을 열어보는 손이 떨렸다. 요지는 단 하나였다.
"귀하가 거주 중인 해당 부동산은 본 신탁회사가 수탁한 신탁재산입니다. 귀하와 위탁자(임대인) 간에 체결된 전세 계약은 신탁 조건상 수탁자(본 회사)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계약으로,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30일 이내에 자진 퇴거하지 않을 경우 법적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박 씨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탁'이 뭔지도 몰랐다. 당장 인터넷을 검색했고,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졌는지 깨달았다.
등기부등본에 있었지만 몰랐던 그 두 글자
다시 등기부등본을 꺼내 들었다. 갑구를 자세히 보니 소유권 이전 내역 아래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신탁 등기'
계약 당일, 박 씨는 소유자 이름만 확인하고 그 아래 줄을 그냥 넘겼다. 등기부등본에 버젓이 기재되어 있었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신탁부동산이란 임대인(위탁자)이 부동산을 신탁회사(수탁자)에 맡긴 것이다. 법적 소유권은 이미 신탁회사로 넘어가 있다. 이런 부동산에서 임차인이 적법하게 전세 계약을 맺으려면 반드시 신탁회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신탁회사 동의 없이 맺은 계약은 법적으로 무효다.
임대인 최○○는 이미 소유권이 신탁회사에 넘어간 집을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박 씨와 계약을 맺었고, 전세금 2억 8천만 원을 가로챘다.
불법 점유자로 전락한 신혼부부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했다. 돌아온 답은 냉혹했다.
"신탁회사 동의 없는 임대차 계약은 무효입니다. 현재 귀하는 법적으로 이 부동산의 점유권이 없는 상태입니다. 신탁회사의 퇴거 요구를 거부하면 강제집행 절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전입신고도, 확정일자도 무용지물이었다. 임차인 보호 규정은 적법한 계약을 전제로 한다. 계약 자체가 무효이니 대항력도, 우선변제권도 주장할 수 없었다.
임대인 최○○는 전세금을 받자마자 신탁 대출을 갚는 데 일부를 쓰고 나머지는 잠적했다. 경찰에 사기 혐의로 고소했지만, 돈은 이미 흩어진 뒤였다.
결국 박 씨 부부가 건진 돈은 5천만 원. 신탁회사 측과의 합의 과정에서 일부를 돌려받은 것이었다. 잃은 돈은 2억 3천만 원, 신혼 3년의 전 재산이었다.
나만 당한 게 아니었다
박 씨의 사연은 드문 경우가 아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국 전세사기 누적 피해자는 3만 6,950명, 피해 보증금 총액은 약 4조 7,000억 원에 달한다. 이 중 20~30대 청년층이 전체의 75%를 차지한다.
신탁부동산을 이용한 전세사기는 그중에서도 특히 교묘한 수법으로 꼽힌다. 등기부등본에 신탁 표기가 있어도 일반인은 쉽게 지나치고, 계약 당시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피해를 당했다면
신탁부동산 전세사기 피해를 입었다면 즉시 다음 조치를 취하세요.
- 증거 보존: 계약서, 등기부등본, 송금 내역, 신탁회사 통보 문서를 모두 확보하세요.
- 경찰 신고: 112 또는 관할 경찰서에 임대인을 사기죄로 고소하세요.
- 임차권 등기명령 신청: 이사를 가더라도 권리 보전을 위해 법원에 신청하세요.
- 전세사기 피해자 결정 신청: 전세사기피해자 지원관리시스템에서 신청하세요.
- 정부 지원 연락: 전세사기 피해지원 콜센터 1670-5878, 대한법률구조공단 132
이 사연은 실제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