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 두 번째 독립, 이번엔 안전하게
정수진 씨(가명, 32세)는 2017년, 서울 영등포구의 한 다세대주택으로 이사했다. 이전 원룸 계약에서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어, 이번엔 꼼꼼히 따져보고 계약하겠다고 다짐했다.
전세보증금은 6천만원. 23세대가 들어선 빌라였고, 건물 외관도 관리 상태도 깨끗했다. 계약 전 정 씨는 직접 등기부등본을 열람했다. 근저당권이 하나 설정돼 있었지만, 채권최고액이 크게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등기부에 문제없으니 괜찮겠지." 공인중개사도 "이 정도는 흔한 조건"이라며 계약을 권했다.
등기부 한 장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위험
정 씨가 확인한 등기부등본에는 근저당권이 표시돼 있었다. 채권최고액 약 18억원. 그러나 정 씨도, 중개를 맡은 공인중개사도 짚고 넘어가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이 근저당권이 정 씨의 세대뿐 아니라 건물 내 나머지 22개 세대 전부와 함께 설정된 '공동근저당'이라는 점이었다.
"등기부에 근저당이 있다는 건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다른 22세대와 함께 묶인 담보라는 설명은 듣지 못했습니다."
공동근저당은 하나의 채권을 여러 부동산이 함께 담보하는 구조다. 건물 전체가 경매에 넘어가면, 배당 순위는 각 세대의 전입일자와 확정일자 순서에 따라 갈린다. 정 씨의 등기부만 봐서는 다른 세대의 전입 시점을 알 수 없었고, 자신이 몇 번째 순위인지 가늠할 방법도 없었다.
건물 전체가 경매에 넘어간 날
2022년, 건물 전체가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다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23세대 중 먼저 전입한 20여 세대는 선순위로 인정받아 보증금 대부분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늦게 전입한 정 씨를 포함한 2세대는 순위에서 밀렸다.
배당 결과를 통보받던 날, 정 씨는 6천만원 중 상당액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등기부등본을 그렇게 꼼꼼히 봤는데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 씨와 같은 처지의 임차인은 계약을 중개한 공인중개사와 소속 공인중개사협회 공제조합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과 2심 모두 패소했다. 법원은 "중개사에게 공동근저당 사실까지 설명할 의무는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뒤집은 판단
포기하지 않고 상고한 끝에, 2025년 12월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공인중개사는 중개 대상 물건의 근저당권 유무뿐 아니라, 같은 담보로 묶인 다른 세대들의 선순위 권리관계까지 확인해 설명할 의무가 있다는 취지였다. 다세대주택 공동근저당과 관련해 국내에서 처음 나온 대법원 판단이었다.
이 판결로 정 씨와 같은 처지의 피해자들이 공인중개사와 공제조합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잃어버린 보증금이 곧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억울함을 제대로 다퉈볼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수법을 조심하세요
이번 사례는 신탁부동산 무단계약, 이중계약, 무자본 갭투자와는 결이 다른 함정이다. 등기부등본이 정상으로 보여도 안심할 수 없는 이유를 정리했다.
- 공동근저당 은닉: 여러 세대가 하나의 근저당(공동담보)으로 묶여 있어도, 내 세대 등기부만 봐서는 이를 알기 어렵다.
- 배당 순위의 함정: 건물 전체가 경매로 넘어가면, 전입일자·확정일자 순서에 따라 세대별 배당 순위가 갈린다.
- 설명 누락: 공인중개사가 근저당 유무만 안내하고, 공동담보 여부와 다른 세대의 권리관계는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다세대·다가구 취약성: 세대수가 많은 건물일수록 공동근저당 구조와 선순위 임차인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피해 예방 체크리스트
- [ ] 등기부등본 열람 시 '공동담보목록 포함' 옵션을 선택해 전체 담보 구조를 확인하세요.
- [ ] 공동근저당이 확인되면, 채권최고액이 건물 전체 가치 대비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세요.
- [ ] 다세대·다가구주택은 주민센터에서 다른 세대의 전입일자·확정일자 현황(임대차 정보)을 열람하세요.
- [ ] 공인중개사에게 공동근저당 여부와 다른 세대 권리관계를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답변을 서면이나 문자로 남기세요.
- [ ] 전세보증금이 건물 시세 대비 과도하지 않은지, 선순위 채권과 합산해 안전한 수준인지 점검하세요.
- [ ] HUG 전세보증보험 가입 가능 여부를 계약 전 반드시 확인하세요.
- [ ]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계약 즉시 받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확보하세요.
피해를 당했다면
전세사기가 의심되거나 피해를 입었다면, 다음 절차를 진행하세요.
- 임차권 등기명령 신청: 이사 후에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경찰 신고: 112 또는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하세요.
- 전세사기 피해자 결정 신청: 전세사기피해자 지원관리시스템(jeonse.kgeop.go.kr)에서 신청하세요.
- 공인중개사 손해배상 청구 검토: 공동근저당 설명의무 위반이 의심되면, 중개사와 소속 협회 공제조합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검토하세요. 2025년 대법원 판결이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 법률 상담: 대한법률구조공단(132), 전세사기 피해지원 콜센터(1670-5878)를 이용하세요.
이 사연은 실제 판결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