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테스 센터에서 만난 남자
박○○ 씨(가명, 40대)는 서울 구로구에서 필라테스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회원들을 관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에게, 2020년 어느 날 새로운 수강생이 등록했다.
수강생으로 등록한 A씨(58세)는 자신을 대기업 본부장이자 재벌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박 씨는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이 아니라,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운동하는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연인이 되다, 이혼을 준비하던 시기
2021년 9월,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박 씨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편의 불륜 문제로 마음이 복잡하던 시기,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A씨의 존재는 큰 위안이 됐다.
박 씨가 "남편이 불륜 관계를 정리하고 근무지 변경을 신청했다는데 잘 안 된 것 같다"고 털어놓자, A씨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가 알아보니 남편이 근무지 변경을 신청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
재벌가 사람이라던 A씨의 한마디는 박 씨의 불안을 더 키웠다. 동시에 A씨는 자신만이 진실을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합법적인 탐정을 써보자"는 제안
A씨는 이어서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합법적인 탐정을 써서 남편이 정말 불륜 관계를 정리했는지 확인해보자."
그러면서 탐정 용역비로 하루 8만원에서 100만원 정도가 든다며, 자신에게 돈을 주면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이혼 문제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박 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작은 크지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A씨는 이후 판사를 소개해주겠다는 명목까지 더하며 돈을 요구하는 빈도를 늘려갔다.
1년, 72번의 송금
2021년 10월부터 2022년 9월까지, 꼬박 1년 동안 박 씨는 탐정 용역비와 판사 소개비 명목으로 총 72차례에 걸쳐 돈을 보냈다. 누적 금액은 1억 7,796만원에 달했다.
한 번에 요구받은 금액이 크지 않았기에 박 씨는 매번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진 돈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가족들에게 돈을 빌리고, 카드 대출까지 받아야 했다.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박 씨의 형편은 무너져갔다.
끝내 나타나지 않은 탐정과 판사
시간이 지나도 탐정이 조사했다는 보고서는 오지 않았다. 소개해주겠다던 판사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제야 박 씨는 지난 1년간 자신이 보낸 돈의 행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수사 결과, A씨는 박 씨에게서 받은 돈을 탐정 용역이나 다른 어떤 용도로도 쓰지 않았다. 개인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A씨에게는 탐정을 고용하거나 판사를 소개할 의사조차 없었다.
법원, 징역 3년을 선고하다
2026년 7월 22일, 서울남부지법 형사3단독 한정석 부장판사는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는 사기죄로 징역형을 복역하고 출소했음에도 누범기간 중 또다시 동종 범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벌가 사람인 것처럼 행세해 피해자의 신뢰를 얻은 뒤 고의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박 씨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은 것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법원은 각종 증거를 토대로 사기 혐의를 인정했다.
다만 A씨가 범행 이후 박 씨에게 약 5,245만원을 송금해 일부 피해 회복이 이뤄진 점은 감경 사유로 반영됐다. 박 씨가 아직 돌려받지 못한 돈은 1억 2,551만원에 달한다.
이런 수법을 조심하세요
- 오프라인 관계를 이용한 신분 사칭: 데이팅앱이 아니라 필라테스 센터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신뢰를 쌓은 뒤 접근했다.
- 재력·신분 과시: "대기업 본부장", "재벌가 사람"이라는 말만으로 상대의 판단력을 흐렸다.
- 개인적 약점 공략: 이혼을 준비 중이던 상황, 남편의 불륜 문제라는 예민한 사안을 파고들었다.
- 사법 절차를 사칭한 명목: "탐정 용역비", "판사 소개비"처럼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불법적인 명목을 내세웠다.
- 소액 반복 편취: 1년간 72차례에 걸쳐 나눠 받아 피해자가 총액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게 했다.
피해 예방 체크리스트
- [ ] 오프라인에서 알게 된 사이라도 상대의 신분과 직업은 별도로 확인하세요.
- [ ] "재벌가", "대기업 임원" 등의 말은 말뿐인 주장일 수 있음을 기억하세요.
- [ ] "탐정을 써서 확인해주겠다", "판사를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은 그 자체로 불법이거나 사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 [ ] 이혼, 불륜 등 예민한 개인사를 이유로 돈을 요구하면 한 번 더 의심하세요.
- [ ] 한 번에 적은 금액이라도 반복해서 요구받는다면 그동안 보낸 총액을 계산해보세요.
- [ ] 가족에게 돈을 빌리거나 카드 대출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미 위험 신호입니다.
- [ ] 연인 관계라도 큰돈을 보내기 전에는 가족이나 친구 등 제3자에게 상황을 알리고 의견을 구하세요.
- [ ] 송금할 때마다 날짜, 금액, 명목을 기록해두세요.
피해를 당했다면
로맨스 스캠이나 이와 유사한 사기가 의심된다면, 다음 절차를 따르세요.
- 경찰 신고: 112 또는 경찰청 사이버범죄 신고시스템(ECRM, ecrm.police.go.kr)에 신고하세요.
- 금융회사 지급정지 요청: 송금한 금융회사에 즉시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금융감독원 1332로 상담하세요.
- 금융감독원 파인(FINE) 포털: fine.fss.or.kr에서 피해 신고 절차와 대응 방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대한법률구조공단: 국번 없이 132, 무료 법률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증거 보전: 대화 내역, 문자, 송금 내역을 캡처해 보관하세요.
- 신종피싱 의심계좌 거래정지 제도 활용: 금융정보분석원(FIU)이 2026년 6월 30일 이 제도를 시행한 뒤 8월 4일까지 집계한 결과, 신종피싱으로 신고돼 임시조치된 사례는 4,935건이었고 이 중 3,750건의 계좌 거래가 정지됐습니다. 유형별로는 로맨스스캠이 1,527건(41%)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신고와 경찰 확인을 거쳐 의심계좌로 판단되면 우선 7영업일, 최대 60영업일까지 거래를 정지할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신고하세요.
이 사연은 실제 보도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피해자는 가명을 사용한 가상의 인물이며, 조직·수법·피해 규모 등 사실관계는 공개된 법원 판결 및 언론 보도를 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