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원만 빌려주면 갚을게"
※ 이 글은 2026년 7월 구속 기소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등장인물은 언론 보도의 익명 표기(피의자 A씨, 피해자 B씨)를 그대로 따랐으며,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2024년 6월, B씨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한 남성을 알게 됐다. 당시 29세였던 남성 A씨는 자신을 서울 여의도의 한 금융기관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여의도 금융기관 직원. 짧은 한 줄이었지만 효과는 분명했다. 돈이 아쉬울 이유가 없어 보이는 사람, 오히려 돈을 잘 아는 사람. 그 한 줄 때문에 B씨는 이후 1년 넘게 상대의 경제 사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A씨는 "좋아한다", "보고 싶다"는 말을 건네며 B씨와 연인처럼 가까워졌다. 그리고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달 18일, 처음으로 돈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세금 문제가 생겼다. 50만원을 빌려주면 갚겠다."
50만원이었다. 부모상을 치르는 중에 잠깐 막힌 돈. 거절할 이유를 찾는 쪽이 더 어색한 액수였다.
갚으면서 빌리는 사람
이 사건을 1년 4개월이나 이어지게 만든 것은 큰 금액이 아니라 '변제'였다.
A씨는 이후에도 갖가지 이유를 대며 돈을 요구했다. 다만 한 방향으로만 돈이 흐르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빌린 돈의 일부를 갚았다. 그리고 다시 빌렸다.
돈을 돌려받은 경험은 강력하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갚는 것을 본 사람에게는 '이 사람은 갚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다음 요청부터는 판단의 문턱이 낮아진다. 빌려주는 행위가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검증된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되돌려준 돈은 A씨 입장에서 손해가 아니었다. 더 많은 돈을 더 오래 끌어내기 위해 치른 비용이었다.
759번, 그리고 1억6020만5700원
그렇게 2024년 6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A씨가 B씨에게서 받아낸 돈은 모두 759차례에 걸쳐 1억6020만5700원에 달했다.
759라는 숫자를 기간으로 나눠보면 이 사건의 성격이 드러난다. 1년 4개월 동안 하루 평균 한 번 이상, 한 번에 평균 21만원 남짓이 오갔다. 한 번에 수천만원을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소액 반복 송금의 무서운 점이 여기에 있다. 20만원은 그 자리에서 판단을 멈추게 할 만한 금액이 아니다. 계좌이체 한 번에 드는 심리적 저항이 거의 없다. 그래서 피해자 본인조차 누적 금액을 체감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른다. 1억6000만원이라는 숫자는 759번의 송금이 끝난 뒤에야 하나로 합쳐져 눈앞에 나타난다.
1년 4개월, 카카오톡뿐이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A씨와 B씨는 1년 4개월 동안 카카오톡으로만 연락했을 뿐,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영상통화도, 만남도 없이 메신저 대화만으로 유지된 관계였다. 상대가 정말 여의도의 금융기관에 다니는지, 부모상을 치렀는지, 세금 문제가 실재하는지를 B씨가 확인할 수 있는 통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A씨 본인의 말뿐이었다.
메신저로만 이어지는 관계에서는 상대가 제공한 정보를 교차 검증할 방법이 없다. 검증되지 않은 한 줄의 자기소개 위에 1년 4개월과 759번의 송금이 쌓인 셈이다.
"출석 못해요" 문자 4번, 그리고 멈춰 선 수사
피해가 드러나고 수사가 시작됐지만, 사건은 여기서 한 번 더 무너질 뻔했다.
경찰은 A씨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2025년 11월과 12월, A씨와 담당 경찰관은 조사 일정을 두고 수차례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A씨는 네 차례 출석 연기를 요청했고, 불참할 경우 어떠한 책임이나 조치도 감수하겠다는 취지의 말까지 했다.
그러나 A씨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경찰은 주소지를 찾아갔지만 A씨의 아버지로부터 "7~8년 전부터 연락이 끊겼다"는 말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경찰은 A씨에 대한 체포영장 등 강제수사에 나서지 않은 채 '수사중지' 결정을 내리고 기록을 검찰에 넘겼다. 피의자의 소재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피해자 입장에서 수사중지는 사실상 사건이 멈췄다는 통보다. 1억6000만원을 잃고, 가해자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답을 받은 상태였다.
기록 속의 작은 의문
수사중지 기록을 넘겨받은 곳은 대구지검 안동지청이었다. 기록을 검토하던 장유정 검사는 한 가지 대목에서 걸렸다.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피의자가, 불과 몇 달 전까지 담당 경찰관과 여러 차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휴대전화도 착신되는 상태였다. 연락이 닿는 사람을 소재불명으로 처리하고 수사를 중단한 것이다. 게다가 피해액은 1억원을 넘었고, 연인 관계를 이용한 사기였다.
2026년 4월 14일, 장 검사는 경찰에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체포영장과 실시간 위치추적을 위한 통신영장 등으로 A씨의 신병을 확보하라는 내용이었다.
수사를 재개한 경찰은 약 3개월간 통신 수사 등 강제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A씨가 일정한 주거 없이 특정 숙박시설에 장기간 머물고 있다는 정황을 확인했고, 2026년 7월 A씨를 구속했다. 계좌영장을 집행해 피해금의 사용처도 분석했다.
조사 과정에서 A씨는 "B씨로부터 받은 돈 대부분을 인터넷 도박 등에 사용했다"고 자백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그는 별도의 스토킹 범죄로도 재판을 받고 있었다. 대구지검 안동지청은 2026년 7월 23일 A씨를 형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759번의 송금이 남긴 것
이 사건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하나는 로맨스스캠이 반드시 딥페이크나 해외 조직 같은 첨단 장치를 동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픈채팅방, 한 줄짜리 직업 소개, 50만원, 그리고 가끔 갚아주는 성의. 이 사건에 쓰인 도구는 그게 전부였다. 정교한 기술보다 '갚으면서 빌리기'라는 단순한 신뢰 관리 기법이 1억6000만원을 만들어냈다.
다른 하나는 수사가 멈춰도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찰의 수사중지 결정은 최종 결론이 아니다. 수사중지 통지를 받은 고소인 등은 상급 경찰관서의 장에게 이의를 신청할 수 있고, 수사중지 기록은 검찰에 송부돼 검사가 위법하거나 부당한 부분에 대해 시정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이 사건에서 사건을 되살린 것은 새로운 증거가 아니라, 이미 기록 안에 있던 문자메시지였다. 소재불명이라던 사람이 몇 달 전까지 수사관과 대화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한 줄이 다시 읽힌 덕분에 759번의 송금이 법정에 서게 됐다.
피해를 입었다면 송금 내역과 대화 기록을 지우지 말고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건을 되살리는 것은 결국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