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전셋집을 구하던 스물아홉 살의 봄
※ 아래 인물은 이번 사건의 전형적인 피해 양상을 보여주기 위해 재구성한 가상의 인물이다. 박OO씨(가명, 20대)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합성 사례이며, 특정 피해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박OO씨(가명, 20대)는 사회초년생이었다. 첫 직장에 다니며 몇 년간 아껴 모은 돈에 대출을 더해, 서울 관악구의 신축 다가구주택에 첫 전셋집을 구했다.
집은 지은 지 얼마 안 돼 깨끗했다. 공인중개사는 "선순위 보증금이 크지 않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박씨는 등기부등본을 확인했지만, 다가구주택 특성상 개별 호수별 권리관계가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그날, 박씨는 이 집이 128명을 울린 거대한 돌려막기 구조의 일부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가족이 설계한 돌려막기
이 사건의 중심에는 중국 국적의 총책 홍모씨가 있었다. 그는 2018년부터 2023년까지 관악구 일대에 다가구주택 11채를 잇달아 신축했다.
건물을 지을 때마다 자금이 필요했다. 홍씨는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의 전세보증금과 담보대출금을 끌어와 건축비를 충당하고, 동시에 먼저 살던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보증금을 메꿨다. 이른바 '보증금 돌려막기'였다.
건물 명의는 홍씨 혼자 갖지 않았다. 아내 이모씨를 비롯해 친인척들에게 명의를 나눠 등록했다.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 이름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조직적으로 범행에 가담했다. 명의가 여럿으로 흩어지면서, 세입자 입장에서는 건물들이 하나의 조직이 굴린 돌려막기 구조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선순위 보증금은 얼마 안 됩니다"
새 세입자를 끌어들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미 선순위 채권으로 사실상 '깡통주택'이 된 건물임에도, 계약 단계에서는 선순위 보증금 규모를 실제보다 축소해 안내했다.
세입자들은 등기부등본을 확인했지만, 다가구주택 여러 세대의 권리관계가 얽혀 있어 전체 선순위 보증금 총액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안심하고 계약한 세입자들의 돈은 고스란히 건축자금과 앞선 세입자들의 보증금 반환에 쓰였다.
이런 식으로 구조가 반복되면서, 새 건물이 지어질 때마다 피해자 명단도 함께 늘어났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다가구주택 11채가 지어지는 동안, 피해자는 128명, 피해액은 약 190억원에 달했다.
깡통이 된 집, 도망친 총책
돌려막기는 신규 계약이 계속 이어져야만 유지되는 구조였다. 그러나 자금 순환이 한계에 부딪히자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건물이 하나둘 늘어났다.
피해 신고가 잇따르자 서울 관악경찰서가 수사에 나섰다. 경찰이 검토한 기록물은 각 500쪽씩 40여 권, 전체 2만여 쪽에 달했다. 수사팀은 이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파헤쳐 조직의 실체를 규명했다.
그 결과 홍씨의 아내 이모씨를 포함해 가족·친인척 등 총 16명이 2026년 2월부터 7월 중순에 걸쳐 사기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다만 총책인 홍씨는 이미 해외로 도피한 뒤였다. 그는 현재까지 검거되지 않고 있다.
법정에 선 것은 아내 이모씨였다. 2026년 7월 말, 이씨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정작 이 구조를 설계한 총책은 해외에 머물며 아직 재판조차 받지 않고 있다.
128명, 190억원, 그리고 남은 질문들
가족 단위 전세사기 조직의 특징은 명의를 여럿으로 나눠 책임 소재를 흐린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여러 명이 건물을 나눠 가지면, 세입자는 물론 수사기관도 전체 구조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이번 사건은 다가구주택 계약의 구조적 위험도 보여준다. 다가구주택은 여러 세대가 한 건물, 한 등기부 안에 얽혀 있어 개별 세입자가 선순위 보증금 총액을 스스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임대인의 설명만 믿고 계약했다가는, 이미 '깡통주택'이 된 집에 보증금을 넣는 셈이 될 수 있다.
박씨와 같은 사회초년생들이 어렵게 모은 돈을 지키려면, 계약 전 등기부등본과 전입세대 확인서를 직접 열람하고 선순위 보증금 총액을 스스로 계산해보는 절차가 필요하다. 이 사건은 그 확인 절차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