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가 밀리던 어느 봄날
박○○ 씨(가명, 26세)는 2년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달 나가는 월세와 생활비는 그를 조여왔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신분증 필요 없음. 선불유심 담보로 즉시 30만원 대출 가능."
박 씨는 눈이 번쩍 뜨였다. 신용조회도, 서류 심사도 필요 없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유심 하나가 뭐 대수라고"
박 씨는 곧바로 문자에 적힌 번호로 연락했다. 상대는 절차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본인 명의로 선불유심 하나만 개통해서 저희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차용증만 쓰시면 바로 입금해드려요."
박 씨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스스로를 설득했다. "유심 하나 넘기는 게 뭐 그리 큰일이겠어. 어차피 안 쓰는 번호인데."
박 씨는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자신의 명의로 선불유심을 새로 개통했다. 상대가 알려준 방식대로 유심 카드를 택배로 보내고, 간단한 차용증에 서명했다. 통화 몇 번, 서류 한 장으로 끝난 절차였다.
며칠 뒤, 박 씨의 계좌로 30만원이 입금됐다. 그 돈으로 밀린 월세를 냈다.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이 흘렀고, 박 씨는 그 유심의 존재를 서서히 잊어갔다.
걸려온 경찰서 전화
한 달쯤 지난 어느 오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관할 경찰서 수사관이라고 밝힌 상대는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박○○ 씨 명의로 개통된 전화번호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사용된 정황이 있습니다. 조사에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박 씨는 처음엔 당황했다. 자신은 돈을 뜯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30만원을 받은 쪽이었다.
"제가 왜 조사를 받아야 하나요? 저는 피해자 아닌가요?"
그러나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그 유심으로 개통된 번호가 대포폰으로 둔갑해 여러 건의 보이스피싱 범죄에 사용됐다는 것이었다. 명의자인 박 씨는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로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다.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경찰서에서 박 씨는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전기통신사업법은 본인 명의의 회선을 타인에게 넘기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다. 대가를 받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명의를 넘긴 순간부터 박 씨는 법을 어긴 사람이 됐다.
"고객님이 넘긴 회선 때문에 피해를 본 분들이 있습니다. 명의를 넘긴 것 자체가 범죄입니다."
박 씨는 억울했다. 자신도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법 앞에서는 "몰랐다"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박 씨는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 처분을 받았다. 30만원을 받으려다 전과 기록까지 떠안게 됐다.
되짚어보는 그날의 선택
박 씨는 지금도 그날의 문자를 떠올린다. "신분증 필요 없이 즉시 대출"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제안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최근에는 "재택부업"을 미끼로 접근하는 변형 수법도 늘고 있다. 구매대행, 리뷰 작성, 댓글 관리 같은 부업을 제안하며 "업무용 유심이 필요하다", "급여 정산을 위해 계좌를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결과는 다르지 않다. 이렇게 넘긴 유심과 계좌는 대포폰·대포통장으로 둔갑해 또 다른 범죄에 악용된다.
박 씨의 사연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급전이 필요한 순간, 누구나 "이 정도쯤이야"라는 유혹에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선택이 자신을 범죄의 도구이자 피의자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