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로 도착한 "소방서 공문"
이○○ 씨(가명, 55세)는 강원도의 한 소도시에서 10여 년째 소규모 펜션을 운영해 온 자영업자다. 성수기를 앞두고 예약 문의에 한창 응대하던 어느 날, 사무실 팩스로 낯선 문서 한 장이 도착했다.
문서 상단에는 관할 소방서 로고와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제목은 "소방시설 안전점검 결과 통보 및 개선명령"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귀 업소는 전기차 충전구역 질식소화포, 캐비넷형 간이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 미비 사항이 확인되었습니다. 개선기한(7일) 내 조치하지 않을 경우 소방시설법 위반으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이 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시즌 중에 영업정지나 과태료 처분을 받으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희 소방서 예방과입니다"
공문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 번호는 지역 소방서 대표번호와 비슷한 형태였다.
"안녕하세요, 관할 소방서 예방과입니다. 보내드린 공문 확인하셨죠? 요즘 숙박업소 대상으로 소방시설 기준이 강화돼서 저희가 순차적으로 안내드리고 있습니다."
담당자라는 남자는 차분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 씨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해결책을 내놓았다.
"저희와 협약된 지정업체를 통해 리튬이온 배터리 소화기랑 질식소화포를 구입하시면, 정부 지원사업 예산으로 구매 비용을 전액 환급해드립니다. 다만 이번 분기 예산 집행 마감이 임박해서, 이번 주 안에 결제하셔야 지원 대상에 포함될 수 있어요."
견적서와 환급 신청서까지 받고 나니
곧이어 지정업체라는 곳에서 견적서가 도착했다. 견적서 하단에도 소방서 마크가 작게 인쇄돼 있었고, "소방청 화재예방 지원사업 협력업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씨는 공문, 전화, 견적서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지자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서류까지 다 갖춰서 보내주는데, 설마 가짜라고는 생각도 못 했죠."
이 씨는 담당자가 알려준 계좌로 리튬이온 배터리 소화기 대금 1,800만 원을 입금했다. 며칠 뒤 담당자는 "캐비넷형 간이 스프링클러도 함께 설치해야 개선명령이 완전히 해제된다"며 추가로 2,200만 원을 요구했다. 이어 "환급 신청을 위해서는 소방방열복 등 부속 장비까지 갖춰야 서류가 통과된다"는 말에 마지막으로 1,000만 원을 더 보냈다. 세 차례에 걸쳐 입금한 금액은 총 5,000만 원에 달했다.
담당자는 환급을 받으려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이 씨의 주민등록번호와 사업자 정보, 계좌번호까지 요구했다. 이 씨는 환급받을 생각에 별다른 의심 없이 정보를 넘겨줬다.
끊긴 전화, 사라진 "예방과"
한 달이 지나도 환급금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 씨는 답답한 마음에 안내받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 나왔다. 불안해진 이 씨는 결국 관할 소방서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저희는 그런 공문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소방기관은 특정 업체를 통한 물품 구매나 비용 입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소방서 직원의 답변에 이 씨는 그제야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문에 찍혀 있던 직인도, 견적서에 있던 소방서 마크도 모두 도용된 이미지였다.
숙박업소를 노린 조직적 수법
경찰 신고 과정에서 이 씨는 자신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숙박업소 사장들이 여러 지역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역 소방본부 집계에 따르면, 최근 접수된 소방기관 사칭 사기 의심 신고 중 상당수가 실제 피해로 이어졌고, 그중 숙박업소 피해 비중이 특히 높았다. 한 업체는 5,000만 원가량의 피해를 본 사례도 확인됐다.
사기 조직은 여름 성수기를 앞두고 소방 점검이 몰리는 시기, 그리고 전기차 충전시설처럼 최근 법 개정이 잦은 분야를 골라 위조 공문을 뿌리는 방식으로 숙박업 사장들의 불안을 파고들었다.
이런 수법을 조심하세요
이 씨를 속인 사기 조직의 수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위조 공문 발송: 소방서 로고와 직인을 도용한 가짜 공문을 팩스·이메일로 발송해 "소방시설 미비"를 통보
- 과태료 협박: 정해진 기한 내 조치하지 않으면 소방시설법 위반으로 과태료가 부과된다며 불안감 조성
- 지정업체 유도: 협약업체를 통해 소화기·스프링클러 등을 구매하면 비용을 전액 환급해준다고 약속
- 긴급성 강조: "이번 주 안에 결제해야 지원 대상"이라며 확인할 시간을 주지 않고 즉시 결제 유도
- 서류로 신뢰 보강: 견적서, 협력업체 문구 등 그럴듯한 서류를 추가로 제시해 의심을 차단
- 개인정보까지 요구: 환급 신청을 명목으로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 추가 편취
- 분할 입금 유도: 한 번에 큰돈을 요구하지 않고 품목을 늘려가며 여러 차례 나눠 입금하도록 유도
피해 예방 체크리스트
- [ ] 소방서·소방본부 명의의 공문을 받으면 팩스·이메일 속 연락처가 아니라, 포털 검색으로 확인한 관할 소방서 대표번호로 직접 사실 여부를 문의하세요
- [ ] 소방기관은 특정 업체를 통한 물품 구매나 계좌 입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원칙만 기억해도 대부분의 사기를 피할 수 있습니다
- [ ] "비용을 전액 환급해준다"는 말과 "지정업체에서만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이 함께 나오면 사기를 의심하세요
- [ ] "이번 주 안에 결제해야 한다"는 식의 마감 시한 압박은 확인할 시간을 뺏기 위한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 [ ] 공문·견적서에 찍힌 로고와 직인은 이미지로 얼마든지 도용될 수 있습니다, 서류 형태만 보고 신뢰하지 마세요
- [ ] 소방시설 설치·개선 의무가 실제로 있는지는 관할 소방서 예방안전과에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로 재확인하세요
- [ ] 환급·지원금 신청을 이유로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를 요구하면 응하지 마세요
- [ ] 이미 입금했더라도 추가 결제를 요구받으면 즉시 중단하고 경찰·소방서에 문의하세요
피해를 당했다면
소방기관 사칭 사기 피해를 입었다면, 다음 순서로 대응해야 한다.
- 경찰 신고: 112 또는 가까운 경찰서에 즉시 신고하고 사이버범죄 신고시스템(ECRM)도 함께 이용
- 은행 신고: 입금한 은행 고객센터에 전화해 계좌 지급정지를 요청
- 관할 소방서 확인: 실제 공문 발송 여부와 소방시설 점검 의무를 다시 한번 공식 확인
- 금융감독원 신고: 1332로 연락해 피해 사실을 알리고 추가 대응 방법을 상담
- 증거 보존: 위조 공문, 견적서, 문자·통화 내역, 계좌번호, 송금 내역을 모두 캡처해 보관
이 사연은 실제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