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번호로 걸려온 전화
2025년 11월, 미국에 거주하는 교민 A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 화면에 뜬 번호는 낯설지 않았다. 주애틀란타 대한민국총영사관의 실제 전화번호였다.
총영사관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발신번호가 스푸핑(caller-ID 조작)으로 얼마든지 도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A씨는 알지 못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경찰청 소속이라고 밝혔다. A씨가 마약 범죄에 연루된 정황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A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순서대로 이어진 사칭 전화
그 뒤로 전화는 계속됐다. 이번에는 검찰청 관계자를 자처하는 사람, 뒤이어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하는 사람이 차례로 연락해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계좌를 검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 계좌에 있는 자금을 미국 내 특정 계좌로 옮기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A씨 입장에서는 이미 총영사관의 실제 번호로 첫 연락을 받은 뒤였다. 경찰, 검찰, 금융감독원이 순서대로 등장하는 절차가 실제 수사 과정처럼 느껴졌다. 여러 기관이 연달아 나서는 모습이 오히려 의심을 지웠다.
손을 떠난 9억 5,000만원
A씨는 안내에 따라 한국 계좌의 자금을 미국 계좌로 이체했다. 그 돈은 곧바로 범죄자가 지정한 또 다른 계좌로 다시 송금됐다.
돈이 손을 떠난 뒤에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정상적인 수사기관이라면 전화로 개인에게 계좌 이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
A씨가 잃은 돈은 7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9억 5,000만원이었다. 이미 여러 계좌를 거친 자금은 추적이 쉽지 않았다.
의원실 자료로 드러난 급증세
이 사건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한정애 의원실이 외교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통해 알려졌다. 자료에 따르면 재외공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등 스캠 피해는 2025년 한 해에만 625건 접수됐다. 보이스피싱을 별도 사건으로 분류해 집계하기 시작한 2024년의 94건에서 폭증한 수치다. 2026년 상반기에만 벌써 192건이 접수됐다.
"최근 재외공관 사칭 보이스피싱이 다수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교부 산하 공공기관에서도 기관 사칭 사기로 1억원 대의 국민 피해가 발생했다"
한정애 의원의 지적이다.
피해는 애틀랜타 한 곳에 그치지 않았다. 2026년 2월에는 주LA총영사관 번호로 "한국 법원이 긴급 송환을 요청했다"며 은행잔고·연금·코인 등 모든 자산 내역과 여권정보, 최근 3년간의 출입국 기록, 지인 연락처까지 빼낸 사건이 접수됐다. 같은 해 7월에도 같은 영사관 번호로 허위 웹사이트 접속을 유도해 주소와 전화번호를 탈취한 사건이 발생했다. 주프랑스대사관, 주호주대사관 등을 사칭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도 확인됐다.
외교부 산하기관인 한국국제교류재단(KF) 아세안문화원을 사칭한 사건도 있었다. 사기 일당은 유령업체를 물건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급처라고 소개했고, 피해업체는 최초 3,000만원을 포함해 3차례에 걸쳐 약 1억원을 선입금했다. 이 사건은 관할 경찰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미주 지역 재외동포를 노린 이런 유형의 사기는 대사관·총영사관 직원이나 재외동포청 직원, 검사, 금융감독원 관계자를 사칭하며 위조 신분증과 공문까지 동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짜 번호도 믿을 수 없다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발신번호는 더 이상 신뢰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실제 기관의 대표번호라도 스푸핑으로 얼마든지 도용될 수 있다.
"기관 사칭 사기 방지를 위해 이메일 안내 등 단순 신고 안내에 그칠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예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
한정애 의원은 이렇게 강조했다. 경찰, 검찰, 금융감독원, 외교부 산하 기관 어디도 전화로 계좌 이체나 자금 이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의심스러운 전화를 받았다면 즉시 끊어야 한다. 그리고 해당 기관의 대표번호로 직접 다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 짧은 확인 한 번이, 평생 모은 돈을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