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대량 주문 전화
지방에서 작은 매장을 운영하는 이○○씨(가명)는 어느 평일 오후, 낯선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 발신번호는 눈에 익은 010으로 시작하는 국내 휴대전화 번호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구청 소속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지역 행사에 쓸 물품을 대량으로 주문하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오랜만에 들어온 큰 주문이었다.
"대신 구매해서 보내주세요"
며칠 뒤, 상대방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주문한 물품을 다른 업체에서 급히 구해야 하는데, 본인들은 직접 처리할 수 없으니 이○○씨가 대신 구매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저희가 나중에 정산해서 한꺼번에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공공기관이라 처리 절차가 있어서요."
공공기관이라는 말에 이○○씨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발신번호도 국내 번호였고, 말투도 차분하고 사무적이었다. 이○○씨는 상대방이 알려준 업체 계좌로 물품 대금을 대신 보냈다.
정산금은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약속했던 정산금은 들어오지 않았다.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구청 대표번호로 확인한 뒤에야, 그런 주문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직원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씨가 보낸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전국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경찰 수사로 드러난 108억대 조직
제주경찰청은 2026년 9월 16일, 사기 및 전기통신사업법 위반(변작기 운영) 혐의로 31명을 검거하고 이 중 12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해외 자금세탁 총책 1명에 대해서는 인터폴 적색수배와 여권 무효화 조치가 내려졌다.
이 조직은 2025년 8월부터 2026년 4월까지 활동했다. 베트남에 머무는 해외 총책이 텔레그램으로 국내 관리책을 모집하고, 관리책이 다시 하위 조직원을 모집하는 점조직 구조였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골드바 판매사기, 중고거래 AI 사진 사기, 그리고 이○○씨가 당한 것과 같은 노쇼 사기까지 세 가지 수법을 동시에 운영한 "하이브리드형" 범죄조직이었다. 총 1,341명이 약 108억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조직은 010 변작기 56대와 유심칩 198개를 이용해 해외 실행책들이 국내 전화번호로 범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번호로 지방자치단체나 한국마사회 같은 공공기관 직원을 사칭해 소상공인에게 접근한 뒤, 물품을 대신 구매해 대납해 달라고 요구하는 수법이었다. 경찰이 전국 신고 이력을 분석한 결과, 이 수법으로만 141명이 약 73억 4천만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됐다. 단순 평균으로 계산하면 1인당 5천만원이 넘는 액수다.
골드바와 중고거래까지, 같은 조직의 다른 얼굴
같은 조직은 "사우디에서 금광이 발견돼 골드바를 시세보다 싸게 판다"며 40~60대를 노린 골드바 판매 사기도 함께 벌였다. 골드바 사기는 2026년 3월부터 본격화됐다. 일부 구매자에게는 실제 골드바를 배송해 신뢰를 쌓았고, 배송이 늦어지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지연되고 있다"는 핑계를 댔다. 이 수법으로 109명이 약 10억 8천만원의 피해를 입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서는 AI로 만든 가짜 사진으로 물건을 실제 보유한 것처럼 꾸며 접근했다. 피해금은 여러 대포통장을 거쳐 인출된 뒤 가상자산으로 세탁돼 해외 총책에게 전달됐다. 조직이 사용한 대포통장은 400여개에 달했다. 중고거래 등을 이용한 피싱 사기의 피해자는 1,091명, 피해액은 약 24억원이었다.
경찰은 이 조직이 특정 범죄 하나에 특화된 게 아니라, 해외 총책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사기 수법을 한 조직 안에 묶어 운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 지역에서만 확인된 피해자도 19명이었다.
이런 수법을 조심하세요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노쇼 사기의 핵심 수법을 정리했다.
- 번호 변작: 해외 발신 번호를 변작기로 국내 010 번호처럼 위장
- 공공기관 사칭: 지자체, 공공기관 직원을 사칭해 신뢰 확보
- 대납 유도: 물품을 직접 구매해 대신 결제해 달라고 요청
- 정산 미이행: 나중에 정산해 준다는 말만 남기고 잠적
- 점조직 운영: 해외 총책-국내 관리책-하위 조직원으로 이어지는 점조직 형태로, 필요하면 조직원과 범행 수단을 공유
경찰 관계자는 "최근 사기조직들이 AI 등을 활용해 실제 물품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사진이나 거래 관련 자료를 조작하는 등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다"며 "온라인 거래 때 사진이나 설명만 믿지 말고 실제 물품 보유 여부와 거래 상대방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피해 예방 체크리스트
- [ ] 발신번호가 010으로 표시돼도 변작된 해외 번호일 수 있습니다
- [ ] 공공기관은 소상공인에게 물품을 대신 구매해 대납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 [ ] 대량 주문 후 "대신 구매해서 보내달라"는 요청은 일단 의심하세요
- [ ] 거래 전 해당 기관 대표번호로 실제 주문 여부를 직접 확인하세요
- [ ] 실제 물품을 받기 전에는 큰 금액을 먼저 보내지 마세요
- [ ] 온라인·중고거래 사진만 믿지 마세요. AI로 조작된 사진일 수 있습니다
- [ ] 정산·환급을 나중에 해준다는 말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해를 당했다면
- 경찰 신고: 112 또는 가까운 경찰서
- 금융감독원 신고: 불법사금융신고센터 1332, 금융소비자정보포털 파인(fine.fss.or.kr)
- 송금 은행에 즉시 연락: 송금한 은행 고객센터에 알리고 지급정지 가능 여부를 문의
- 증거 보존: 통화 녹음, 문자, 송금 내역을 모두 캡처해두세요
이번 사건은 경찰이 31명을 검거(12명 구속)했다고 발표한 수사 단계이며, 해외 자금세탁 총책 1명에게는 인터폴 적색수배와 여권 무효화 조치가 내려졌다. 이 조직은 소상공인을 노린 노쇼 사기뿐 아니라 골드바·중고거래 사기까지 세 가지 수법을 동시에 운영하며 약 108억원을 가로챘다. 낯선 대납 요구는 공공기관을 사칭한 목소리라도 일단 의심해야 한다.
이 사연은 실제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