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두고 만난 "안전한 부업"
박○○ 씨(가명, 50대)는 정년을 몇 해 앞두고 있었다. 큰 욕심은 없었다. 은퇴 후 생활비에 보탤 안정적인 수입원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박 씨에게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이 다가왔다. 지인은 인천 연수구에 있는 'KR이심'이라는 업체 이야기를 꺼냈다.
"eSIM(이심)이라고, 요즘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 오면 다 쓰는 유심이야. 이걸 재판매하는 사업인데, 회사가 다 알아서 팔아주고 수익을 정산해줘. 원금 손실 걱정은 안 해도 된대."
스마트폰만 있으면 외국을 오가는 관광객들이 실제로 쓰는 eSIM은 낯설지 않은 통신 서비스였다. 박 씨는 지인의 설명을 의심하지 않았다.
eSIM 재판매, 그럴듯했던 사업 구조
2024년 문을 연 이 회사가 안내한 구조는 단순했다. 회사 전용 플랫폼에서 eSIM 데이터를 구매하면, 회사가 이를 방한 외국인 관광객에게 판매하고, 그 수익을 투자자 계정으로 정산해준다는 방식이었다.
담당 직원은 자신 있게 말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계속 늘고 있어서 eSIM 수요가 폭발적입니다. 원금은 절대 손실되지 않아요."
마침 그 무렵 한국을 찾는 해외 관광객 소식이 뉴스에 자주 나왔다. 직원은 한술 더 떠 "BTS 콘서트 특수로 앞으로 더 큰 수익이 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 씨는 실체가 있는 사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지인을 소개할수록 불어나는 수당
박 씨를 이 사업에 끌어들인 것도, 더 깊이 빠지게 만든 것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기존 회원이 새로운 사람을 소개하면 eSIM 1장당 7~10%의 마진을 얹어줬다. 여기에 1단계부터 8단계까지 등급을 나눠, 등급이 오를수록 매달 월급 형태의 수당까지 지급한다고 홍보했다.
박 씨도 처음엔 소액으로 시작했지만, 주변에서 "정상적으로 사업이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투자금을 늘렸다. 지인을 소개하고 수당을 받을 때마다, 이 사업이 진짜라는 믿음은 더 단단해졌다.
화려한 연례회, 커지는 베팅
회사는 매년 3일간 이어지는 연례회를 열었다. 자동차, 순금, 가전제품, 상품권을 내건 추첨 이벤트와 연회 참석권까지 제공됐다. 이런 경품 이벤트에 회사가 쏟아부은 돈만 수백억 원대에 이른다고 훗날 보도됐다.
연례회 현장에서는 "추가로 투자하면 마진이 더 커진다"는 제안이 이어졌다. 화려한 행사와 눈앞의 경품을 지켜본 회원들은 지갑을 더 열었다. 박 씨 역시 노후자금 상당 부분을 이 사업에 밀어 넣었다.
하루 만에 무너진 신뢰
2026년 6월 22일 오전까지만 해도 출금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3시쯤, 플랫폼에는 낯선 안내가 떴다.
"보유 자산의 20%를 세금 명목으로 USDT(가상화폐)로 선납해주세요."
세금을 가상화폐로, 그것도 출금 전에 먼저 내라는 요구였다. 사실 그전부터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회원들이 있었다. 이들이 만든 카카오톡 대책방에는 다음 날인 6월 23일까지 800명이 넘는 회원이 모였다. 그 사이 회사는 플랫폼 운영을 전면 중단하고 잠적했다.
전국을 덮친 피해
박 씨처럼 발이 묶인 투자자는 전국적으로 2만~3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개인별 피해액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다양했고, 일부는 1억 원을 넘기도 했다. 정확한 총 피해액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언론들은 수백억 원대에서 수천억 원대까지 서로 다른 규모로 피해를 추산하고 있을 뿐, 경찰 수사로 확정된 금액은 아니다.
집중수사관서로 지정된 인천경찰청에 접수된 고소만 2026년 8월 14일 기준 1,366건 1,440명에 달했다. 고소장은 전국 각지 경찰서에서 계속 제출되고 있어 고소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피해자 대책위는 보고 있다. 노후자금 대부분을 잃은 고령층 중에는 개인파산이나 개인회생을 고민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회초년생 중에는 투자금을 마련하려고 대출까지 받았다가 빚만 떠안은 경우도 있었다.
수사는 진행 중, 상처는 현재진행형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사기 및 유사수신행위규제법 위반 혐의로 회사 대표 등을 입건해 수사하고 있다. 아직 재판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피해자 중에는 "실제 사업자가 많아서 정상적인 사업이라 믿었는데, 결과적으로 전 재산을 잃었다"고 토로하는 이도 있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어디까지가 설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상 회사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 역시 지금도 그날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런 수법을 조심하세요
- 정상 사업으로 위장: eSIM 재판매라는 실존하는 서비스를 내세워 투자 상품처럼 포장
- 원금 보장 문구: "관광객 증가로 수요 폭발", "원금 손실 없다"는 말로 안심시킴
- 다단계 리크루팅: 지인 소개 시 마진과 등급별 수당을 지급해 투자자를 스스로 확산시킴
- 경품 이벤트: 자동차·순금·가전제품 추첨으로 추가 투자를 유도
- 세금 명목 코인 선납: 출금 직전 "세금 명목으로 가상화폐를 먼저 내라"고 요구한 뒤 잠적
피해 예방 체크리스트
- [ ] 출금 전 세금·수수료 명목으로 추가 입금(특히 가상화폐)을 요구하면 100% 사기입니다
- [ ] 지인 소개 수당을 주는 다단계 구조 자체를 경계하세요
- [ ] "원금 보장"을 내세우는 투자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 [ ] 경품 추첨이나 화려한 행사는 추가 투자를 끌어내려는 미끼일 수 있습니다
- [ ] 매달 고정 수익이나 등급별 수당을 약속하는 사업은 폰지 사기의 전형적 패턴입니다
- [ ] 투자 전 금융소비자정보포털 파인(fine.fss.or.kr)에서 유사수신 등록 여부를 확인하세요
- [ ] 실제 사업자가 있어 보인다고 해서 투자 구조까지 정상이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피해를 당했다면
- 경찰 신고: 112 또는 가까운 경찰서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
- 금융감독원 신고: 불법사금융신고센터 1332
- 증거 보존: 투자 계약서, 정산 내역, 회사 안내문, 카카오톡 대화를 모두 보관하세요
- 공동 대응: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고소 절차를 진행하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박 씨는 여전히 그날 오후 3시를 기억한다. "세금부터 내라"는 메시지 한 줄이, 평생 모은 돈을 지워버렸다.
이 사연은 실제 사기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과 세부 사항을 변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