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둔 주말, 산에 오르다
올해 63세인 정○○ 씨는 30년 넘게 철물점을 운영해 온 자영업자입니다. 은퇴를 앞두고 최근 부쩍 늘어난 취미가 주말 산행이었습니다. 그날도 정 씨는 이른 아침 배낭을 메고 인근 야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능선을 반쯤 올랐을 무렵,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발신번호는 낯설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또박또박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범죄수사부입니다. 정○○ 씨 명의 계좌가 대규모 마약 밀수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히 확인이 필요합니다."
정 씨는 처음엔 코웃음을 쳤습니다. 마약이라니, 평생 법 없이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정 씨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심지어 거래 은행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위조된 공문서와 구속영장
전화를 건 사람은 정 씨에게 "직접 확인해보라"며 인터넷 주소를 하나 보냈습니다. 접속해보니 실제 검찰청 홈페이지와 거의 똑같은 화면이 떴고, 정 씨의 이름이 적힌 구속영장과 수사 공문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정 씨는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실제로는 정교하게 위조된 가짜 홈페이지였지만, 산속에서 혼자 화면을 마주한 그에게는 이를 의심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정 씨 계좌가 자금세탁에 이용된 정황이 있습니다. 자산을 보호하시려면 저희가 안내하는 보안 검수 프로그램을 설치하셔야 합니다."
정 씨는 시키는 대로 앱을 설치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휴대전화는 사실상 사기범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실시간으로 감시당한 계좌
앱이 설치된 뒤, 사기범은 정 씨의 화면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며 지시를 내렸습니다. 은행 앱을 열게 하고, 이체 버튼을 누를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듯 정확한 타이밍에 다음 지시가 이어졌습니다.
"지금 화면에 보이는 계좌로 2,800만원을 이체하세요. 수사가 끝나면 즉시 반환됩니다."
정 씨는 산 중턱에 선 채로 떨리는 손으로 이체를 진행했습니다. 사기범은 곧이어 "명의 재산 전체를 보호해야 한다"며 남은 예금 1억원마저 송금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이 사실을 가족에게 말하면 오히려 가족이 공범으로 몰릴 수 있습니다. 절대 비밀로 하세요."
산속까지 찾아온 경찰
그 무렵, 평소와 다른 정 씨의 계좌 움직임을 수상히 여긴 은행과 가족의 신고가 겹치면서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위치를 확인한 경찰은 정 씨가 오르던 등산로까지 직접 찾아왔습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자 정 씨는 처음엔 경계했습니다. 사기범이 미리 "누가 접근해도 응하지 말라"고 겁을 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분증을 내밀며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는 형사 앞에서, 정 씨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버님, 검찰은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전화하지 않습니다. 지금 하고 계신 건 보이스피싱입니다."
형사의 설득 끝에, 정 씨는 남은 1억원의 송금을 가까스로 멈췄습니다.
되찾은 것과 되찾지 못한 것
정 씨는 그 자리에서 경찰과 함께 은행에 지급정지를 요청했습니다. 이미 보낸 2,800만원 중 일부는 신속한 신고 덕분에 회수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경찰의 도착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 씨는 평생 모은 노후자금 1억원까지 고스란히 잃을 뻔했습니다. 정 씨는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아찔하다고 말합니다.
이 사연은 실제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