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사칭한 메시지,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2021년 11월, A씨는 자녀 이름으로 온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아빠 나 휴대폰 분실보상금을 받으려면 인증번호를 입력해야 하는데 대신 사이트에 접속해서 번호 좀 받아줘"
낯선 요청이 아니었다. 자녀는 평소에도 이런저런 부탁을 종종 해왔다. A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상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이듬해인 2022년 11월, B씨도 비슷한 문자를 받았다.
"엄마 나 휴대폰이 고장났는데 엄마 폰을 쓰려면 원격프로그램 설치하고 엄마 신분증 사진을 보내줘야 한대"
화면 너머 상대의 말투는 자녀와 다르지 않았고, 다급한 사정도 그럴듯했다.
원격제어 앱과 신분증 사진, 그다음 벌어진 일
상대는 A씨에게 원격제어 앱을 설치하고,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보상금 처리에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A씨는 시키는 대로 앱을 깔고 신분증을 촬영해 전송했다.
B씨 역시 같은 방식으로 원격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신분증 사진을 넘겼다.
그 순간부터 휴대폰의 주도권은 더 이상 A씨와 B씨의 것이 아니었다. 사기범은 원격제어 앱으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모바일 OTP를 가로챘고, 신분증 사진으로 본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A씨 명의로는 대출과 현금서비스를 합쳐 약 4,900만 원이, B씨 명의로는 대출 약 8,000만 원이 빠져나갔다.
"내가 받지도 않은 대출"이 내 이름으로
A씨와 B씨는 자신이 신청한 적 없는 대출이 자기 이름으로 실행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상환 독촉은 고스란히 두 사람 앞으로 날아왔다. 분실보상금이나 고장 수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했던 일이, 순식간에 수천만 원의 빚으로 돌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은행과 카드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쟁점은 명확했다. 원격제어 앱을 설치하고 신분증 사진을 넘긴 행위가 '중대한 과실'인지, 그리고 비대면으로 거액의 대출을 내준 금융회사의 본인확인 절차가 충분했는지였다.
법원의 판단, "중대한 과실 아니다"
법원은 두 사람의 행위를 중대한 과실로 보지 않았다. 자녀를 사칭한 메시지에 속아 앱을 설치하고 신분증 사진을 보낸 것은, 누구라도 그 상황이라면 범할 수 있는 실수라고 봤다.
대신 법원은 전자금융거래법 제9조를 근거로 들었다. 이 조항은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접근매체로 이뤄진 거래에 대해 금융회사가 배상 책임을 진다고 정하고 있다. 법원은 은행의 비대면 본인확인 절차가 미흡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A씨 사건은 서울중앙지법 민사45단독 오연수 판사가 2026년 8월 21일 1심을 선고했다. 은행과 보이스피싱 현금인출책 최모씨 등이 공동으로 약 2,700만 원을, 카드사가 660만 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B씨 사건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0-3부 제갈창 부장판사가 2026년 6월 23일 2심을 선고했다. 은행 2곳이 약 6,500만 원을 배상하라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기지 못한다
두 판결은 분명 의미 있는 결과다. 하지만 이런 승소가 흔한 일은 아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5대 시중은행을 상대로 한 관련 소송 32건 가운데 피해자가 이긴 사건은 6건, 약 18.75%에 그쳤다. 동아일보가 최근 3년간 명의도용 비대면 대출 관련 판결문 30건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피해자가 이긴 경우는 6건(20%)에 그쳤다.
기간과 대상은 다르지만, 두 통계가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소송을 걸어도 빚을 떠안은 채로 끝난다는 것이다.
B씨를 대리한 박재형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영상통화로 신분증을 확인하는 등 본인 확인 방법을 조문에 직접 넣는 방식의 법 개정이 필요하며, 기술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도 뒤늦게 예방 장치를 넓히고 있다. 본인 명의의 신규 대출·카드론을 사전에 막아두는 '여신거래 안심차단' 서비스 가입자는 2026년 4월 기준 약 364만 명에 이른다. 비대면 계좌개설을 막는 '비대면 계좌개설 안심차단' 가입자도 1년 사이 16만 명에서 287만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미리 신청해둬야만 효과가 있다.
이런 수법을 조심하세요
- 자녀·가족 사칭 메시지: 메신저로 신분증 사진이나 앱 설치를 요구하면 진짜 가족인지 전화로 반드시 재확인
- 원격제어 앱 설치 유도: "보상금", "수리 접수" 같은 명목으로 앱을 깔게 하면, 휴대폰 속 모든 금융앱의 통제권을 넘기는 것과 같음
- 신분증 사진 요구: 어떤 명목이든 메신저로 신분증 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정상적 절차가 아님
- 비대면 대출의 허점: 모바일 OTP와 신분증 사본만으로 거액이 대출되는 비대면 절차의 빈틈을 노림
- 소송은 최후의 수단: 은행 배상 판결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패소한다. 사고가 나기 전 막는 것이 최선
피해를 당했다면
- 금융감독원 불법사금융·보이스피싱 상담: 1332
- 경찰 신고: 112
- 본인 명의 대출·계좌 조회: 금융소비자정보포털 '파인'(fine.fss.or.kr)
- 지급정지 및 대출 사고 접수: 해당 금융회사 콜센터에 즉시 연락
- 사전 예방 신청: 은행 영업점이나 모바일 앱에서 '여신거래 안심차단' 신청
이 사연은 실제 판결 사례를 보도 내용에 기반해 정리했으며, 당사자 표기는 법원·언론 보도의 익명 표기를 따랐습니다.